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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바하

음악으로 영혼을 구원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2

by salarygoodbye 2024.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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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hann Sebastian Bach ] (1685년 ~ 1750년)

 

바흐의 탄생및 성장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음악가 바흐는 1685년 독일의 아이젠하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집 안에 무려 30여 명의 음악가가 배출될 정도로 

독일에 대표적인 음악 가문이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14살 많은 큰형 크리스토프가 집안을 꾸려 가야 했기 때문에 정규 수업을 받기 힘들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당대의 저명한 작곡가 파헬벨의 제자로 오르가니스트였던 큰형으로부터 오르간을 배우며

음악 수업을 받는다

소년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바흐는 스스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일 유명 작곡가들의 악보를 필사하거나 편곡하면서 음악 공부를 했다

특히 오르간에 대한 열정인 대단하여 당시 오르간의 대가인 라인 켄의 오르간 연주를 듣기 위해 백리길을 

걸어가 연주를 듣고 올 정도였다고 한다

 

음악활동

 1703년 아른 슈타트 신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게 되면서 음악 활동을 시작한 바흐는 이듬해 뤼베르크에서 그 당대 최고의 오르간 주자 북스테우테의 연주에 감명을 받아 더욱 열심히 오르간에 몰두했다

 1707년에는 마리아 바르바라를 만나 결혼했으며 바이마르 궁정 악사로 초대되면서 그의 음악 활동은 절정에 달하게 된다

 바이마르 에서는 오르가니스트로 활약하면서 음악 작곡에 몰두했는데 이때 그의 음악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명성을 얻었으며 1717년에는 퀘텐궁의 궁정 악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퀘텐은 경제적으로도  바흐에게 풍요함을 주었을뿐만 아니라 교회 음악 대신 세속 음악을 만드는 계기가 된 곳이기도 했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첼로 조곡을 비롯하여 “평균율 클라비아 곡집 제1권”과 “안나 막델라나를 위한 클라비아 소곡집 제1권” 등의 역작이 이곳에서 작곡되었다

 퀘텐에선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하는 개인적인 불운을 겪게 되지만 그 후 16살 연하인 안나 막달라나를 만나 재혼을 하며

더욱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쳤던  이 시기가 바흐에겐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후 바흐는 1723년에 라이프 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 음악 감독이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요한 수난 곡과 마태 수난곡,  골드베르크 변주곡,  평균율 클라비아 곡집 제2권, 푸가의 기법과 같은 수많은 종교 음악과 칸타타 등의 걸작을 발표하게 된다

철저한 기독교 신자로서 평생 동안 청교도적 경건함과 신성함을 토대로 신을 아 찬미하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데 헌신했다 또한 당대의 음악적 양식은 물론 전 시대의 음악 형식까지 모두 자신의 음악 안에서 통합시키고 용해 시켜 새로운 음악의 틀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바로코 형식을 완성한 음악가로 평가되고 있다

 

 1749년 바흐는 지나치게 음의 음악에만 몰두하여 실명 상태일 정도가 되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수그러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7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바흐의 작품 

 평균율 클라비아 곡집 제 1권 제2권

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남긴 최대의 음악 유산이며 흔히들 인류의 음악이 모두 다 소멸한다 해도 이곡만 있으면 다시 살려낼 수 있다라는

말로  이 작품의 위대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이 곡의 본래 명칭은 “다양한 변주를 가진 아리아”다

주제  로 사용되고 있는 아리아는 “안나막델라나 바흐”를 위한 클라비아 소곡집 제2관에 있는 곳으로 장중하면서도 사라방도 풍의

아리아인데  이 곡은 놀랍도록 치밀하여 전곡을 연주하는데 무려 1시간이나 걸리는 곡이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6곡

1720년경 바흐가 퀘텐에 거주할 때 작곡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당시에는 그 첼로에 대한 인식이 독주 악기라기보다는 저음을 보강하는 보조적인 악기로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비발디는이 악기에 매료되어 협주곡을 만들정도였다 

이 명곡은 19세기말까지 사장되어 있다가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발굴하여 수십 년간 다듬고 연주하면서부터

새롭게 그 진가가 알려지게 되었다

카잘스는” 나는이 곡을 연구하면서 위대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미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Johann Sebastian Bach